이거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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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거는 1450년 전후에 출생하여 1502년 사망한 조선 시대의 문신이다. 1480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암행어사, 세자시강원보덕 등을 역임하며 연산군의 스승이 되었다. 성격이 강직하여 언관으로 활동하며 부정한 관리를 탄핵하여 '호랑이 장령'으로 불리기도 했다. 연산군 시기에는 순천도호부사를 지냈으며, 이순신의 조부 이백록을 뒀다.
이거는 생년월일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1450년 전후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2. 생애
성종 11년(1480년) 과거 시험에 합격하였고,[1] 성종 14년(1483년) 한림, 홍문관 박사, 경연사경을 역임하였다. 성종 15년(1484년) 암행어사로 나가 과천에서 현감 최급을 비리 혐의로 잡아 올렸다. 이후 성종 17년(1486년) 사간원정언, 성종 18년(1487년) 이조좌랑, 성종 20년(1489년) 이조정랑을 역임하였다.
성종 22년(1491년) 7월 통덕랑으로 승진하여 수사헌부장령이 되었고, 이후 종진부전첨, 세자시강원보덕으로 세자였던 연산군의 스승이 되었다. 연산군 1년(1495년) 장악원정, 승문원참교, 한학교수를 겸하고 춘추관편수관으로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연산군 3년(1497년) 정3품 통정대부로 승진하여 순천도호부사가 되었으나,[2] 70세 노모를 걱정하며 순천부사 사임을 청하였다.[2] 어머니는 숙인 행주 기씨(幸州奇氏)이다.
연산군 5년(1499년) 임기가 만료되어 호군이 되었고, 이후 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연산군 8년(1502년) 3월에 세상을 떠났다.[3]
이거는 성격이 강직하여 '호랑이 장령'으로 불렸다.[4] 연산군의 스승이었으나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아첨하지 않고 학문 등에 대해 상소[5]를 하여 연산군이 좋아하지 않았다. 사신(史臣)은 이거에 대해 젊었을 때는 청렴하고 정직하다고 이름이 났으나, 순천 부사가 되어서는 청렴하지 못하였다고 평가했다.[6]
묘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 산 53-1번지에 있으며, 부인은 숙부인 임피 진씨이다. 다른 배위 임피 진씨는 군사 진극충의 딸이다.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이백복(李百福), 차남은 이백록(李百祿), 삼남은 이백령(李百齡)이다.
2. 1. 초기 생애 및 관직 생활
이거는 생년월일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1450년 전후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성종 4년(1473년) 10월에 할아버지인 영중추부사 이변이 세상을 떠났다.[1] 성종 11년(1480년) 과거 시험에 합격하였고,[1] 성종 13년(1482년) 경연청 설경이 되었다. 성종 14년(1483년) 한림, 홍문관 박사, 경연사경을 역임하였다.
성종 15년(1484년) 암행어사로 나가 과천에서 현감 최급을 비리 혐의로 잡아 올렸다. 이후 성종 17년(1486년) 사간원정언, 성종 18년(1487년) 이조좌랑, 성종 20년(1489년) 이조정랑을 역임하였다. 성종 22년(1491년) 7월 통덕랑으로 승진하여 수사헌부장령이 되었고, 성종 24년(1493년) 종진부전첨을 역임하였다. 성종 25년(1494년) 세자시강원보덕으로 세자였던 연산군의 스승이 되었다.
연산군 1년(1495년) 장악원정, 승문원참교, 한학교수를 겸하고 춘추관편수관으로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연산군 3년(1497년) 정3품 통정대부로 승진하여 순천도호부사가 되었으나,[2] 70세 노모를 걱정하며 순천부사 사임을 청하였다.[2] 어머니는 숙인 행주 기씨(幸州奇氏)이다. 연산군 5년(1499년) 임기가 만료되어 호군이 되었고, 이후 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연산군 8년(1502년) 3월에 세상을 떠났다.[3] 묘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 산 53-1번지에 있으며, 부인은 숙부인 임피진씨이다.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2. 2. 언관 활동 및 성종과의 관계
이거는 성격이 강직하여 언관으로 있으면서 부정한 관리에 대해서는 관직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탄핵하여 호랑이 장령으로 불리었다.[4]
연산군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학문을 즐겨하지 않았고, 간언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처리하는 경향을 보였다. 연산군은 조지서, 황계옥, 이거, 정여창 등을 좋아하지 않았고, 김수동을 매우 좋아하였다. 이거는 연산군의 스승이었으나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아첨하지 않고 학문, 언행, 신하에 대한 대우, 간언의 수용 등에 대해 상소[5]하여 연산군의 미움을 샀다. 이후 연산군 3년(1497) 이거는 순천도호부사가 되어 멀리 떠났다가 연산군 5년(1499)에 복귀한다.
사신(史臣)은 이거에 대해 젊었을 때는 청렴하고 정직하다고 이름이 났으나, 순천 부사가 되어서는 청렴하지 못하였다고 평가했다.[6]
2. 3. 연산군과의 관계 및 지방관 생활
이거는 성격이 강직하여 언관으로 있으면서 부정한 관리에 대해서는 관직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탄핵하였기에 '호랑이 장령'으로 불리었다.[4] 이거는 연산군의 스승이었으며,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아첨하지 않고 학문·언행·신하에 대한 대우·간언의 수용 등에 대해 상소[5]를 하여 연산군이 좋아하지 않았다.
연산군 3년(1497년) 이거는 순천도호부사가 되어 멀리 떠나 연산군 5년(1499년) 복귀한다.
사신(史臣)은 논하기를 "이거는 젊었을 때에는 청렴하고 정직하다고 이름이 났으나, 순천 부사가 되어서는 자못 청렴하지 못하였다."고도 한다.[6]
2. 4. 사망 및 가족 관계
이거는 연산군 8년(1502년) 3월에 별세하였다.[3] 묘소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 산 53-1번지, 덕수공원 봉례공 이효조 묘 아래에 있으며 표석이 있다.
이거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 | 이름 | 비고 |
---|---|---|
증조부 | 이공진(李公晉) | 통의대부 사재시사 |
증조모 | 초계 정씨(草溪鄭氏) | 증 정경부인, 보승별장 정광조의 딸 |
조부 | 이변(李邊) | 1391년 - 1473년 |
조모 | 양성 이씨(陽城李氏) | 정경부인, 순찰사 이현신의 딸 |
부 | 이효조(李孝祖) | 통훈대부 통례원 봉례 |
모 | 행주 기씨(幸州奇氏) | 숙인, 진사 기자환(奇自煥)의 딸 |
본인 | 이거(李琚) | 통정대부 병조참의 |
부인 | 임피 진씨(臨陂陳氏) | 숙부인, 현령 진세번의 딸 |
장남 | 이백복(李百福) | 통훈대부 함종현령 |
자부 | 경주 이씨(慶州李氏) | 숙인, 판관 이종순의 딸 |
차남 | 이백록(李百祿) | 호는 풍암(楓巖), 이순신의 조부 |
자부 | 초계 변씨(草溪卞氏) | 증 정부인, 생원 변감의 딸 |
손자 | 이정(李貞) | 1511년 - 1583년, 이순신의 부, 이완의 조부 |
손부 | 초계 변씨(草溪卞氏) | 변수림의 딸 |
자부 | 재령 이씨(載寧李氏) | 증 정부인, 현령 이련의 딸 |
손자 | 이현(李賢) | |
손부 | 죽산 박씨(竹山朴氏) | 부사 박영의 딸 |
손자 | 이귀(李貴) | |
손부 | 우계 이씨(羽溪李氏) | 참봉 이준근의 딸 |
삼남 | 이백령(李百齡) | 생원 |
자부 | 우계 이씨(羽溪李氏) | 감찰 이대근의 딸 |
숙부 | 이효종(李孝宗) | 통훈대부 황주판관 |
성종실록에 의하면 이거는 '성격이 강직하여 언관으로 있으면서 부정한 관리에 대해서는 관직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탄핵하였다.'고 평가하여 호랑이 장령으로 불리었다.
[1]
문서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배위는 숙부인 임피 진씨로, 현령 진세번의 딸이다. 묘는 상하분으로 되어있으며 성원공이다. 또다른 배위 임피 진씨는 군사 진극충의 딸이며, 조부는 삼군진무선판 목사 진여안, 증손이다. 외조부는 참판 초계 변효경으로, 초계 변씨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이거는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이백복은 음보로 관직에 올라 1535년(중종 30) 형조좌랑을 거쳐 통훈대부 함종현령에 이르렀고, 차남 이백록은 생원시에 합격한 후 선교랑 평시서봉사에 이르렀다. 이순신은 둘째 아들 이백록의 손자이다. 삼남 이백령은 참봉을 지냈다.
이거의 졸년월일은 구 족보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8년(1502) 3월 29일 기록에 의거하여 기록되었으며, 과정은 덕수이씨 신유보에 따른다.
3. 평가
연산군의 스승이었던 이거는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아첨하지 않고 학문·언행·신하에 대한 대우·간언의 수용 등에 대해 상소[5]를 하여 연산군이 좋아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왕이 동궁에 있을 적부터 이미 학문의 강독을 즐겨하지 아니하였고, 간언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처리하는 조짐이 말씨와 얼굴에 나타났다. 요속들 중에 강정 자지(剛正自持)한 이가 바로잡아 풍간(諷諫)하면 곧 얼굴을 찌푸렸다. 조지서(趙之瑞)·황계옥(黃啓沃)·이거·정여창(鄭汝昌) 등을 늘 좋아하지 않았고, 김수동(金壽童)의 사람됨을 매우 좋아하였다. 즉위한 후, 일찍이 서연(書筵)을 모시던 사람이 말하기를 이하생략."[4]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후 연산군 3년(1497.1) 이거는 순천도호부사가 되어 멀리 떠나 연산군 5년(1499.7) 복귀한다.
조선왕조실록 연산일기 중 사신(史臣)은 "이거는 젊었을 때에는 청렴하고 정직하다고 이름이 났으나, 순천도호부사가 되어서는 자못 청렴하지 못하였다."라고 논평하기도 했다.[6]
4. 가족 관계
관계 이름 비고 증조부 이공진(李公晉) 통의대부 사재시사 증조모 초계 정씨(草溪鄭氏) 증 정경부인, 보승별장 정광조의 딸 조부 이변(李邊) 1391년 - 1473년 조모 양성이씨(陽城李氏) 정경부인, 순찰사 이현신의 딸 부 이효조(李孝祖) 통훈대부 통례원 봉례 모 행주 기씨(幸州奇氏) 숙인, 진사 기자환(奇自煥)의 딸 본인 이거(李琚) 통정대부 병조참의 부인 임피 진씨(臨陂陳氏) 숙부인, 현령 진세번의 딸 장남 이백복(李百福) 통훈대부 함종현령 자부 경주 이씨(慶州李氏) 숙인, 판관 이종순의 딸 차남 이백록(李百祿) 호는 풍암(楓巖), 이순신의 조부 자부 초계 변씨(초계 변씨) 증 정부인, 생원 변감의 딸 손자 이정(李貞) 1511년 - 1583년, 이순신의 부, 이완의 조부 손부 초계 변씨(초溪卞氏) 변수림의 딸 자부 재령 이씨(載寧李氏) 증 정부인, 현령 이련의 딸 손자 이현(李賢) 손부 죽산 박씨(竹山朴氏) 부사 박영의 딸 손자 이귀(李貴) 손부 우계 이씨(羽溪李氏) 참봉 이준근의 딸 삼남 이백령(李百齡) 생원 자부 우계 이씨(羽溪李氏) 감찰 이대근의 딸 숙부 이효종(李孝宗) 통훈대부 황주판관
이거의 장남 이백복은 음보로 관직에 올라 1535년(중종 30) 형조좌랑을 거쳐 통훈대부 함종현령에 이르렀고, 차남 이백록은 생원시에 합격한 후 선교랑 평시서봉사에 이르렀다. 이순신은 이백록의 손자이다. 삼남 이백령은 참봉을 지냈다.[1]
참조
[2]
서적
조선왕조실록
[3]
서적
조선왕조실록
[4]
서적
조선왕조실록
[5]
서적
조선왕조실록
[6]
서적
조선왕조실록
[7]
서적
德水李氏世譜 덕수이씨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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